미얀마에서 비교적 성공적인 사업가로서 삶을 살고 있는 남자 왕 신홍은 오랫동안 불면증에 시달리던 중, 14일 동안 수도승으로 살면 불면증이 깨끗하게 사라진다는 점쟁이의 조언을 받아들어 단기 출가를 결심한다.
수도승이 사회적으로 큰 존경을 받는 불교 국가 미얀마에서 단기 출가는 흔히 있는 일이다. 미얀마 남자들 사이에서는 성인이 되기 위한 일종의 통과 의례로서 일정 기간 동안 절에 들어가 스님이 되는 전통이 있으며, 미얀마와 국경이 인접해있는 또 다른 불교 국가 태국도 지난 7월 탐루앙 동굴 조난 사고에서 구조된 태국 유소년 축구단 소년들이 최근 단기출가 형식으로 승려 체험을 마쳐 화제가 된 바 있다. 14일 남짓 짧은 기간이지만 진짜 스님들처럼 머리를 깎고 붉은 수도복을 입게된 남자는 하루에 사과 한 알 만을 먹으며 잠시 수도승의 삶을 살게된다.
미얀마 출신으로 최근 주목받는 아시아 감독 중 하나인 미디 지의 신작 <14개의 사과>(2018)는 잠시 속세를 떠난 한 젊은 사업가의 14일 간 여정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다. 점쟁이의 조언에 따라 단기 출가를 결심한 남자는 절에 가는 길에 시장에 들러 14일 동안 먹을 사과 14개를 사고, 카메라는 차에서 내려 사과를 사고 다시 차 안으로 돌아오는 남자의 행동과 동선을 핸드헬드 기법을 이용한 롱테이크로 고스란히 담는다.
자동차 바퀴가 제대로 굴러가지 못하는 비포장도로를 달려 힘겹게 목적지에 도착한 남자는 삭발을 하고 수도승의 삶을 시작한다. 14일 동안 수도승이 된 남자는 매일 아침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탁발에 나서고, 사찰에 찾아오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주기적으로 한 알의 사과를 챙겨먹는다.
국민의 95% 이상이 불교를 믿는 국가 답게 부처와 수도승을 향한 미얀마 사람들의 믿음은 절대적이다. <14개의 사과>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자면, 스님들이 마시고 사용할 물을 항아리에 길어올려 그것을 머리 위에 짊어지고 십리도 더 되어 보이는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마을 아낙네들의 행렬이다. 고되고 힘든 행군에도 여인들은 그 흔한 짜증 한번 내지 않는다. 부처님과 승려들을 위한 보시 행위이기 때문이다. 미얀마에서는 매일 아침 승려들이 탁발에 나서는 풍습이 고스란히 유지되고 있는데, 탁발에 나선 스님들에게 시주를 하며 예를 갖추는 사람들의 모습은 종교를 떠나 일종의 경건함이 느껴진다.
이렇게 불법승 삼보(부처, 부처들이 설한 가르침, 승려)에 완전히 귀의한 것처럼 보이는 미얀마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삶은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주민들은 돈을 벌기 위해 하나둘씩 마을을 떠나고, 절에 들어오는 시주금은 날로 줄어든다. 세속 사람들에 비해 물질에 초연한 삶을 살아야할 것 같은 승려들도 나날이 줄어드는 시주액이 여간 신경쓰이는 것이 아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절 한켠에 주차된 남자의 도요타 자동차가 더욱 반짝여 보인다.
불면증을 해소하기 위해 일시적인 출가를 택한 남자의 마음은 승려의 옷을 입고 있어도 온통 속세, 세간의 일에 향해 있다. 그에게 종교란 더 나은 삶을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이것은 현대인들이 종교를 대하는 보편적인 자세 이기도 하다. 아니, 애초부터 종교의 시작은 기복(祈福) 신앙에서 출발한다. 미얀마 사람들이 풍족하지 않는 생활 속에서도 탁발 풍습을 계속 이어나가는 것은 어릴 때부터 시주 문화가 몸에 베어있는 것도 있지만, 부처님과 스님들께 보시를 함으로써 복을 기원하는 마음도 없지 않아 있을 것이다.
수도승으로서 일과를 수행하는 틈틈이 하루 식량인 사과 한 알을 먹고 산보를 하는 남자는 별 말 없이 그 자신의 바로,지금,여기의 행동을 이어나간다. 영화는 그런 남자의 행동을 묵묵히 찍을 뿐, 남자의 심경에 대한 그 어떠한 질문조차 던지지 않는다. 과연 하루에 단 하나의 사과를 먹으며 수도승으로 14일을 버텼던 남자가 얻은 깨달음은 무엇일까. 오랫동안 쉽게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와 같은 질문이다. 제15회 EBS국제다큐영화제(EIDF2018) 상영작 <14개의 사과>는 다큐멘터리 전용 VOD 사이트 'D-BOX'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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