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명배우 틸다 스윈튼의 출세작으로 알려진 <올란도, Orlando>(1993)는 페미니즘 영화의 교본 으로도 유명한 명작이다. 




엘리자베스 1세가 통치하던 1600년, 16세 귀족 신분인 올란도(틸다 스윈틴 분)은 여자라고 해도 믿을 만큼 빼어난 미모를 자랑하는 미소년이다. 올란도의 아름다운 용모에 반한 엘리자베스 1세는 올란도를 곁에 두며, 영원히 늙지말고 죽지도 말라는 계시를 내린다. 하지만 이 말이 화근이 될 줄이야. 엘리자베스 1세의 바람대로 올란도는 400년 넘게 장수하는 뱀파이어와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다. 


여왕이 죽은 뒤 열린 사교 파티에서 올란도는 러시아 대사의 딸 사샤에게 한 눈에 반한다. 올란도에게는 이미 결혼을 약속한 약혼녀가 있었지만, 그는 이 사실에 개의치 않는다. 대놓고 바람을 피우는 올란도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길 관객들에게 올란도는 말한다. “남자는 자신의 마음을 따라야 해.” 


이렇게 약혼녀를 버리고 사샤를 선택했지만, 그녀에게 버림받은 올란도는 실연의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 시의 세계로 빠져든다. 하지만 얼마 안가 귀족들의 위선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시인의 독설을 이기지 못한 올란도는 시를 포기하고, 1700년 오스만 제국(현 터키) 대사를 자원 하며 정치에 입문한다. 대사로 활동하며 양국간의 관계를 돈독하게 위해 많은 애를 썼던 올란도는 그 공로로 영국왕이 내리는 작위를 받던 찰나에 전쟁이 터지고, 전쟁의 공포를 이기기 위해 깊은 잠에 빠져든 올란도는 여자의 몸으로 바뀌게 된다. 


여자가 되어 영국으로 돌아온 올란도는 자신이 남자의 몸으로 살 때는 미처 몰랐던, 남성 우월주의의 모순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남성으로 살던 시절, “남자는 자신의 마음을 따라야 한다.”면서 수많은 여성들에게 상처를 주었던 올란도는 이제 여성인 자신을 농락하는 남자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여자는 재산을 소유할 수 없는 당시 법 때문에, 올란도는 자신의 집과 재산을 몰수당할 위기에 놓인다. 


남자 귀족으로 살았을 때는 온갖 권위와 혜택을 누리며 살아온 올란도는 여성의 몸으로 바뀌는 순간, 남자와 달리 여자에게 가해지는 온갖 사회적 차별과 한계를 몸소 체험하게 된다. 이제 남자가 아닌 여자가 되었기에 재산을 몰수당할 위기에 놓인 올란도에게 그녀의 몸을 호시탐탐 노리는 남자들은 자신들과 결혼하여 평생 남편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 것을 종용한다. 그럼에도 올란도는 결혼 대신 자유를 택했고 ,세월이 흘러 여성도 재산을 가질 수 있는 시대를 맞게 됨에 따라 자신의 재산을 되찾을 수 있었다. 


400년 만에 자신이 원래 살았던 저택을 찾아간 올란도는 1800년 자유주의자인 쉘머딘 사이에서 낳은 아이와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면서, 자기 스스로를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완전한 인간이 되었음을 선언한다. 남자도, 여자도 아닌 한 인간으로서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꿈꾸는 <올란도>는 남녀 모두 동등한 권리와 기회를 갖는 페미니즘을 지향한다.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페미니즘의 의의를 다시 새길 수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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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국내기준), 채널 CGV 통해 생중계된 90 아카데미 시상식(Academy Awards, 2018) 작품상은 많은 이들의 예측대로 기예르모 토로 감독의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이하 <셰이프 오브 워터>)에게 돌아갔다. 여기에 기예르모 토로 감독이 감독상 까지 받으며, <셰이프 오브 워터> 작품상, 감독상, 미술상, 음악상 등 총 4관왕에 올랐다. 




1960년대 후반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셰이프 오브 워터>는 여성, 흑인, 장애인 등 백인 남성 중심인 미국 사회에서 소외된 사회적 약자에 주목하는 로맨스 판타지 영화다. 언어 장애가 있는 엘라이자(샐리 호킨스 분)는 그녀가 청소부로 일하는 미국 항공우주 연구센터 비밀실험실에 끌려온 괴생명체(더그 존스 분)에게 운명적인 사랑을 느끼고, 그를 구하기 위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탈출 작전을 감행한다. 극중 엘라이자와 가장 적대적인 관계를 맺는 안타고니스트는 군인 출신으로 백인 남성 우월주의로 똘똘 뭉친 리차드 스트릭랜드(마이클 섀넌 분)이다. 자신의 출세를 위해, 아마존 유역에서 추앙받던 괴생명체를 잡아 실험실까지 끌고온 스트릭랜드는 자신에게 호락호락 하지 않는 괴생명체를 제압하기 위해 온갖 물리적 폭력과 협박을 가한다. 괴생명체를 실험실에서 탈출시킨 엘라이자 때문에 계획에 차질을 빚은 스트릭랜드는 괴생명체를 다시 잡아들이기 위해 폭행과 살인도 서슴지 않고 벌인다. 


온 몸이 비늘로 덮인 괴생명체는 스트릭랜드를 위시한 사람들에게 괴물로 불린다. 실제 괴생명체는 스트릭랜드의 두 손가락을 자르고,  엘라이자의 절친한 이웃인 자일스(리차드 젠킨스 분)이 키우는 고양이를 잡아먹는 위협적이고 괴기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괴생명체는 누군가가 자신을 공격하려 들지 않는 이상, 자신에게 우호적으로 다가오는 상대방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다. 반면, 스트릭랜드는 자신의 출세와 명예를 위해서 자기보다 약해 보이는 존재를 괴롭히고, 끊임없이 자신이 가진 힘을 과시하려 든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보통 사람들에게 괴물로 불리는 괴생명체가 아닌 스트릭랜드를 시대가 낳은 괴물로 명명하고자 한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엘라이자가 벌이는 괴생명체의 탈출 작전을 통해 자신과 다른 성별, 인종, 정체성을 가진 이들을 배격하는 백인 남성(스트릭랜드)의 만행에 맞서는 사회적 약자의 연대를 보여준다. 언어장애를 가진 여성 엘라이자와 괴생명체를 주축으로 이들을 도와주는 주변인들은 모두 흑인 여성 노동자, 가난한 성소수자 예술인, 소련 출신 과학자 등 미국 사회의 주류와 거리가 먼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면면들 때문에 <셰이프 오브 워터>는 반이민정책, 인종차별, 여성 및 소수자 혐오로 점철된 트럼프 시대를 저격하는 우화로 평가받았다. 트럼프 시대를 빗댄 <셰이프 오브 워터>가 영화를 통한 시대정신 구현을 중시하는 아카데미의 선택을 받은 것은 일찌감치 예상된 수순이었다.


남우주연상은 <다키스트 아워>에서 처칠 역을 맡은 게리 올드만, 여우주연상은 <쓰리 빌보드>의 프란시스 맥도맨드, 남우조연상은 <쓰리 빌보드>의 샘 록웰, 여우조연상은 <아이, 토냐>의 엘리슨 제니가 수상했다. 배우상 같은 경우에는 지난 1월 열린 제75회 골든글로브 수상결과와 같아 눈길을 끈다. 각본상은 <겟 아웃>의 조던 필레 감독이 받으며, 아카데미 최초 흑인 각본상 수상이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한편, 90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골든글로브 시상식에 이어, 하비 와인스타인 성추문으로 촉발된 미투 운동을 지지하고 연대하는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이날 시상대에 오른 영화인들의 말말말도 빛났다. <셰이프 오브 워터>로 감독상을 받은 기예르모 델 토로는 스스로를 멕시코 출신으로 소개하며, 자신과 같은 이민자들이 문을 계속 두드렸으면 좋겠다는 수상소감을 발표하였고,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프란시스 맥도맨드는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차원에서 이날 아카데미 시상식 모든 부문에 후보에 오른 여성들을 일으켜 세우며 모두가 박수갈채를 받게하는 진풍경을 만들기도 했다 ,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여성, 소수자를 품고자 하는 아카데미의 선택이 빛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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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순례 감독의 <리틀 포레스트>(2018)는 일본에서 만화, 영화로 제작된 바 있는 동명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다. 서울 살이에 지친 혜원(김태리 분)은 고향에 정착하게 되고, 그곳에서 직접 재배한 농작물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사계절을 보낸다. 




극중 주인공이 직접 키운 농작물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장면이 영화의 대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리틀 포레스트>는 tvN <삼시세끼> 시리즈를 보는 것 같다. 귀촌을 선택한 젊은 친구들이 경치좋은 풍경에서 삼삼오오 모여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는 모습은 영락없이 JTBC <효리네 민박>이다. 본의 아니게 요즘 가장 트렌디한 예능의 모습과 닮아 있는 <리틀 포레스트>는 원작 만화, 영화를 보지 않아도 요즘 관객들이 친숙하게 느낄 수 있는 핫한 요소들이 군데군데 존재한다. 


도시에 살던 사람이 시골로 내려가 산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다. 시골에서 자란 혜원 또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아무 것도 이룬 것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혜원의 표현에 의하면 그녀는 서울에서 도망치듯 고향으로 떠밀려왔다. 지금까지 자존심 하나로 버텨온 혜원은 도시에서 고향으로 떠밀려온 자기 자신이 용납되지 않는다. 그래서 혜원은 고향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곧 서울로 돌아갈 것.”이라는 의사를 강력히 피력한다. 하지만 다시 도시로 돌아간다고 뾰족한 수도 없을 뿐더러, 무엇보다도 혜원은 고향에서 농사 짓고 살아가는 삶이 마음에 든다. 계속 이 땅에서 터를 일구며 건강하게 살고 싶다. 하지만 그 자존심이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리틀 포레스트>에서 도시 라이프에 지친 청춘은 시골로 돌아가 몸과 마음을 치유 받는다. 눈만 뜨면 논, 밭일을 해야하고 간단한 끼니조차 직접 해서 챙겨야하는 귀농 생활은 결코 녹록지 않다. 그래도 농작물 재배에 땀과 열정을 쏟은만큼 결과물이 좋으면 그간 누적된 피로가 싹 가시겠지만, 안타깝게도 농사는 개인이 잘해서 되는 것만이 아닌, 자연의 뜻이다. 


농촌에서 자랐지만, 농사는 처음 지어보는 초보 농부 혜원 역시 그녀의 첫 작품에서 종종 쓴 맛을 겪는다. 앞으로 혜원은 농사를 지으면서 셀 수도 없이 많은 쓴 맛을 경험할 것이고, 농사일을 택한 것에 대한 회의감도 들 것이다. 그럼에도 혜원은 쉽게 고향땅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쓴 맛이 강한 만큼 농사가 주는 단 맛도 엄청나지만, 돌아갈 땅이 있다는 것, 자신의 땅이 있다는 것, 이것이 혜원이 고향땅에 눌러 앉게 만든다. 




어릴 때 몸이 좋지 않은 아버지의 요양을 위해 아버지의 고향으로 내려온 혜원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에도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엄마(문소리 분)와 함께 그곳에서 살았다. 혜원이 정착하고자 하는 땅은 어릴 때 살던 고향이자, 엄마와의 많은 추억이 깃든 그녀만의 작은 숲이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리틀 포레스트>는 직역 하자면 작은 숲, 영화 내용으로 비추어보면 자기만의 공간 정도로 풀이될 수 있다. 도시 생활은 실패했다고 하나, 조상대대로 물려준 집과 땅이 있는 혜원은 맘 편히 쉴 수 있는 그녀의 집이 있고, 자신이 원하는 농작물을 기를 수 있는 땅이 있다. 그리고 죽마고우인 재하(류준열 분)와 은숙(진기주 분)이 혜원의 곁을 든든히 지키고 있고, 마을 주민들 모두 혜원이 어릴 때부터 봐왔던 친밀한 관계다. 고향에 자기만의 숲을 만들고자 했던 혜원의 귀농이 남들에 비해서 비교적 수월 했던 이유다. 


영화는 말한다. 혜원처럼 시골이 고향이 아니더라도 어느곳에서 라도 자신만의 숲을 가질 수 있다고. 하지만 각박한 도시 생활에 지쳐 귀농을 잠시 생각하다가도 이런저런 현실적인 문제에 지레 포기하게 되는 다수의 현대인에게 그래도 돌아갈 수 있는 땅이 있었던 혜원의 자급자족 생활은 판타지일뿐이다. 도시인들의 꿈으로만 그치는 전원생활의 유유자적한 일상들을 연예인들을 통해 대리만족 느끼게 해주는 tvN <삼시세끼>, <윤식당>, JTBC <효리네 민박>이 인기를 끄는 이유다. 




시골로 돌아가 유유자적, 안분지족의 삶을 강조하는 <리틀 포레스트>는 아이러니 하게도 시골에 자신의 집과 땅, 마음씨 좋은 일가친척, 친구가 있기 때문에 안정적인 귀농이 가능하다는 현실적인 조건들이 자꾸 돋보인다. 그럼에도 <리틀 포레스트>가 요근래 공개된 한국 상업영화에 비해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영화를 구성하는데 있어서 큰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는 것, 여성 캐릭터를 다루고 대하는 방식에 있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안분지족을 지향하는 혜원의 삶처럼 헛된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기교를 부리는 대신, 인물과 자연, 인물간의 관계에 집중하고 그 속에서 영화의 답을 찾고자 한다. 영화에서 혜원의 친구로 등장 하는 재하는 혜원을 마음에 두고 있긴 하지만 그녀를 데이트 상대로만 대하기 보다  함께 농사를 짓고 고향의 땅을 일구는 동지로 존중하고자 한다.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혜원이 가진 주체성이다. 고향땅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재하와 같은 친구들, 동네 어르신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자신을 둘러싼 결정적인 문제에 대한 답은 혜원에게 있다. 고향땅에서 자연의 이치를 온몸으로 깨쳐간 혜원은 그렇게 자신만의 숲을 만드는 방식을 스스로 터득하고 이행하고 있었다. 농촌을 <삼시세끼>, <효리네 민박>처럼 판타지적인 요소로 소비한다는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여성이 가진 주체성을 주목하고, 그에 대한 답을 자연스럽게 찾아가게 하는 영화. 이러한 작품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Posted by 너돌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