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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전망대

전설의 주먹. 40대 남자의 뜨거운 눈물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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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금 2억원을 두고 고교 시절 한 때 친구였던 세 남자가 뭉쳤다. 


88 올림픽 국가대표를 꿈꾸던 복싱 유망주였지만  지금은 상처하고 파리만 날리는 국숫집을 운영하는 임덕규(황정민 분), 사당고 싸움짱에서 지금은 잘나가는 샐러리맨으로 변신한 이상훈(유준상 분)에 영웅본색을 울부짖는 남서울고 짱에서 지금은 그저 그런 3류 조폭으로 살고 있는 신재석(윤제문 분)까지.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려, 25년간 연락이 두절되었던 세 친구가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순전히 돈 때문이다. 그들은 돈 혹은 자신들의 불안정한 지위를 유지시켜줄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때문에 덕규, 상훈, 재석은 잠깐의 쪽팔림을 무릅쓰고, 카메라 앞의 링 위에 올라서서 한동안 끊었던 주먹질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 


말이 좋아, '전설의 주먹'이지, 사실 그들은 소위 '일진'이라고 불리던 문제적 과거가 있는 남자들이다. 때문에 과거 한 주먹 하던 중년 남성들이 자신의 잘나갔던(?) 과거를 걸고, 링 위에 올라서는 설정은, 행여나 학교 폭력을 미화하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의구심을 들게 한다. 





하지만, 영화 <전설의 주먹> 강우석 감독은 역시나 그답게 영리하게 일진 문화 미화 우려에서 철저히 비켜나간다. 


"저도 아저씨처럼 20년 뒤에 '전설의 주먹'에 출연하려고요."


극 중 임덕규의 딸(지우 분)을 괴롭히는 학교 일진은 임덕규를 동네 뒷산에 불러낸 후 이렇게 말한다. 힘없는 학생을 괴롭히는 것에 아무런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 불량 학생들은, 25년 전 임덕규와 이상훈, 신재석의 모습과 그대로 오버랩된다. 


국가대표 선수가 되겠다는 일념 하에 꾹꾹 잘 참아 오다가,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국가대표 선발에서 탈락한 이후 홧김에 사고를 저지른 덕규는, 그 때 저지른 자신의 소싯적 실수가 어린 딸에게 그대로 부메랑으로 돌아오는 것에 참회의 눈물을 흘린다. 





신재석과의 첫 대면과 그 때 그 사건 외엔 비교적 잘 살아왔다고 믿어온 덕규와 달리, 고교 시절 동창들이 기억하는 정반대의 덕규의 모습은, 아무리 사내의 의리를 앞세운다한들, 결국은 삐딱한 반항이었을 뿐인 일진과 학교 폭력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을 가중시킨다. 


1988년보다 더 심각한 상황으로 도래한 학교 폭력 문제를 넘어, 예나 지금이나 계속 이어져 오고 있는 재개발의 어두운 그림자와, 부도덕한 재벌3세의 횡포, 불법 스포츠 도박을 둘러싼 승부조작, 리얼리티 서바이벌 오디션의 빛과 그림자. 그리고 강우석 감독에게 무슨 예지력이라도 있었는지 전혀 국정원 비밀요원(?)같지 않는 성지루까지 현재 한국이 안고 있는 사회 문제를 두루두루 파헤치는 강우석 감독의 예리한 시선은 놀라울 정도로 현시대를 살아가는 관객들의 공감대를 자아낸다. 





하지만, <전설의 주먹>의 메인 테마는, 살기 위해 전쟁터로 자진해서 뛰어들어가는 이 시대 어른들의 슬픈 자화상이다. 


25년 전 멋있어 보이기 위해 주먹을 앞세운 남자들은 이제 자신들이 먹여살릴 가족을 위해 힘겹게 주먹을 쥔다. 그 중에서 그나마 가장 사정이 좋아보이는 상훈 또한 고교 시절 같이 다니던 친구에 앞서 여전히 정신연령에 18살에 머물러있는 망나니 재벌 3세 손진호(정웅인 분)의 비유를 맞춰주느라, 자신의 몸 속에 남은 간과 쓸개를 다 빼준지 오래다. 





아내와 사별한 이후, 자신과 사이가 소원해진 사춘기 딸 하나 잘 키우겠다고 피나는 이를 악물고 죽자사자 싸우는 덕규, 가난의 대물림을 막기 위해 비굴함도, 기러기 아빠의 지독한 외로움도 마다하지 않는 상훈, 어릴 적 잘못된 꾀임에 빠져 친구들과 달리 어둠의 굴레에서 벗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재석. 한 때 멋도 모르고 주먹 좀 휘두른다고 으시되었던 아이들도 어느덧 또래 일진들에게 얻어맞는 자식의 안위를 걱정하는 부모가 되었다. 그러면서 언제 만신창이가 되어 내쳐질지 모르는 불안감에 맞서 하루하루를 용케 잘 버텨내야한다.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책임감을 짊어진 채, 링 위에 올라선 세 남자의 그림자는 이 각박한 시대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아 서글퍼보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2억원의 어마어마한 가치를 뛰어넘는 떳떳한 어른으로서 자존감을 회복한 세 남자는 아무리 힘들고 더럽다 한들,  그럼에도 이 세상을 잘 살아야하는 어른들을 위로하고자하는 <전설의 주먹>의 진정성을 우뚝 서게 한다. 그렇게 강우석 감독은 자신만의 묵직하면서도 진한 표현법으로 또 하나의 볼만한 영화를 만들어내었다. 4월 10일 개봉. 


한 줄 평: 이 시대 모든 어른들을 위한 강우석의 묵직한 위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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