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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우리나라 정치인들이 롤모델로 삼고있는 군주는 세종대왕, 정조, 고려 태조왕건, 여자는 선덕여왕이다. 하지만 다소 특이하게도 이명박 대통령은 영조를 좋아하는 듯 하다. 공무원 시험 국사문제를 보면, 대충 그 당시 집권자가 어느 군주를 사랑했는지 대충 짐작이 가능하다. 참여정부 때에는 정조관련 문제가 자주 나왔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정조가 나오는 드라마, 영화가 많이 쏟아졌다. 하긴 김영삼 전 대통령도 자신을 정조와 자주 비교했다고한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 들어서 영조에 관한 문제가 출제되더니, 급기야 작년 9급 공채 국사시험에서는 영조의 청계천 준설을 비롯, 영조의 업적을 묻는 문제가 2개나 나와서 많은 수험생들의 실소를 자아냈다. 딱히 그분과 영조의 공통점은 청계천밖에 없어보이는데 말이다.
아무튼 자기 자식을 뒤주에 가둬 죽였다는 오점이 있긴하다만, 그래도 영조는 우리나라 역사를 통틀어 훌륭한 군주로 손꼽힌다. 하지만 그는 하마터면 왕이 될 수도 없는 운명이였다. 왜나 그는 잘 알다시피 천민 출신 무수리의 뱃속에서 나온 아들이였기 때문이다.
총명하기 그지 없고, 무너저가는 조선 후기의 기틀을 잡으면서, 훗날 손자 정조와 함께 조라는 칭호까지받은 영민한 군주였다만, 영조의 아킬레스건은 늘 항상 무수리 아들이였다는 거고, 심지어 영조가 즉위하고 있던 당시에는 물이라는 말도 못꺼내게 했단다. 오죽하면, 자신과 비슷한 처지였던 중국고사가 적혀있는 책마저 금서로 정해놨는데, 그걸 손자 정조가 몰래 보다가 하마터면 아버지 사도세자처럼 목숨을 위협받은 적까지 있었다니, 그의 무수리 노이로제는 끝까지 영조의 발목을 잡았다.
젊은 시절, 연잉군 시절 영조. 눈매가 예사롭지 않다.
하지만 이미 그의 아버지 숙종 시절 양반지상주의에 심취해있던 학자들의 뒷골을 땡기는 센세이션이 하나 일어났었다. 바로 중인 출신 장희빈이 서인 노론 계열 인현왕후를 내쫓고 중전이 된거다. 그 이전까지는 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비록 중인도 일반 백성이 봤을 때는 지배계급이였으나, 양반들 입장에서 보면 기술이나 하는 천한 것들이였다. 그리고 장희빈이 사약을 받고, 인현왕후가 복위되도 중인의 아들 경종은 왕위에 올랐다. 그 이전에도 중인이 후궁이 되는 경우는 있었다만, 아무리 중전에게 후사가 없어도, 중인, 천민 아들을 왕으로 옹립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만큼 양반중심질서는 엄격했다.
허나 임진왜란 전후로 굳건하던 신분계급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선조가 백성들을 배반하고 나홀로 의주로 피난가서 한양이 비워져있을 때, 노비들이 가장 먼저한건 노비문서가 보관되어있던 장예원을 불태우는 것이었다. 그 후 노비든, 상민이든 중인이든 돈을 모았으면 납속책이든 공명첩이든 해서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켰다. 추노에서 노비였던 언년이가 양반이 된것도 이때문이다. 아무튼 도망간 노비가 너무 많아서, 양반들은 대길이,업복이같은 추노꾼들을 양성했지만, 대실패였다. 비록 고려 최충헌 무신집권시절처럼 거센 노비반란 운동은 없었다만, 더이상 양반들이 예전 종들을 끌고오는 건 무리였다. 결국 노비제도 자체가 무의미해진 정조때, 정조는 노비 추쇄법을 없애고, 노비해방을 추진했으나, 그 때문에 서인 노론 벽파에게 독살당했다는 설도 만무하다.
노년시절 영조. 무수리 출신으로 궁중암투에 살아남은 동이 아들 답게, 독살설, 요절이 많았던 조선후기 왕들 중 아버지 숙종과 함께 재위기간이 긴 왕으로 꼽힌다.
하지만 아무리 왜란시절 불과 5%에 불과하던 양반이 50%가 됬다고해도, 노비들이 도망을 갔다고해도, 지배계급입장에서 노비를 해방한다는 건 달가운 일이 아니다. 그 당시 노비도 재산이였다. 한마디로 노비해방을 한다면, 자신들의 귀중한 재산이 없어지는 꼴인데, 어떤 지배층이 달가워하겠나. 하지만 왕들의 입장에서는 일단 노비가 양민이 되서 세금을 낸다면, 그만큼 국가재산이 늘어나고, 또한 집권층의 세력을 줄일 수 있으니,성리학적 지배질서가 무너진다한들, 그들에게는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였다. 게다가 영조, 정조는 성리학적 질서니 붕당의 존재를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그당시 붕당이 폐허단계까지 가서 바로 잡을 필요는 있었다만, 영조는 공론의 주재자인 산림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산림역할을 자임해, 여론을 사원에서 공부하는 선비들이 아니라 국민들로 확대하기도 하였다. 정조는 한술 더떠서 '만천명월주인옹'이라는 호까지지면서 철인군주라고 자칭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상민이나 노비출신이였던 서얼들을 구제하기까지한다. 이쯤되면 오늘날 이들은 독재자라는 소리까지 들을 법하다.
하지만, 아무리 시대상황이 신분계급이 붕괴되고 있는 상황이라도, 노비제도를 완화하고자,어머니가 천민이 대다수인 서얼을 없애고자, 노력한 이는 바로 이 영조,정조였다. 그 때 시대상황이 그럴 수 밖에 없다고하더라도, 어쩌면 천민출신소생이라는 치명타를 가지고 있는 영조와 그 피를 가진 정조였기에, 더욱 노비제도 폐지에 정성을 쏟아을 수도 있겠고, 자신이 천민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역시 그들과 비슷한 서얼구제에 관심을 가져서 그들을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양성하고 싶겠구, 아울려 자신들의 천한 출생을 뒤에서 비웃는 양반들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하여, 조선왕조를 중흥하려는 꿈이 절실했는지도 모른다.
허나 임진왜란 전후로 굳건하던 신분계급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선조가 백성들을 배반하고 나홀로 의주로 피난가서 한양이 비워져있을 때, 노비들이 가장 먼저한건 노비문서가 보관되어있던 장예원을 불태우는 것이었다. 그 후 노비든, 상민이든 중인이든 돈을 모았으면 납속책이든 공명첩이든 해서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켰다. 추노에서 노비였던 언년이가 양반이 된것도 이때문이다. 아무튼 도망간 노비가 너무 많아서, 양반들은 대길이,업복이같은 추노꾼들을 양성했지만, 대실패였다. 비록 고려 최충헌 무신집권시절처럼 거센 노비반란 운동은 없었다만, 더이상 양반들이 예전 종들을 끌고오는 건 무리였다. 결국 노비제도 자체가 무의미해진 정조때, 정조는 노비 추쇄법을 없애고, 노비해방을 추진했으나, 그 때문에 서인 노론 벽파에게 독살당했다는 설도 만무하다.
노년시절 영조. 무수리 출신으로 궁중암투에 살아남은 동이 아들 답게, 독살설, 요절이 많았던 조선후기 왕들 중 아버지 숙종과 함께 재위기간이 긴 왕으로 꼽힌다.
하지만 아무리 왜란시절 불과 5%에 불과하던 양반이 50%가 됬다고해도, 노비들이 도망을 갔다고해도, 지배계급입장에서 노비를 해방한다는 건 달가운 일이 아니다. 그 당시 노비도 재산이였다. 한마디로 노비해방을 한다면, 자신들의 귀중한 재산이 없어지는 꼴인데, 어떤 지배층이 달가워하겠나. 하지만 왕들의 입장에서는 일단 노비가 양민이 되서 세금을 낸다면, 그만큼 국가재산이 늘어나고, 또한 집권층의 세력을 줄일 수 있으니,성리학적 지배질서가 무너진다한들, 그들에게는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였다. 게다가 영조, 정조는 성리학적 질서니 붕당의 존재를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그당시 붕당이 폐허단계까지 가서 바로 잡을 필요는 있었다만, 영조는 공론의 주재자인 산림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산림역할을 자임해, 여론을 사원에서 공부하는 선비들이 아니라 국민들로 확대하기도 하였다. 정조는 한술 더떠서 '만천명월주인옹'이라는 호까지지면서 철인군주라고 자칭했다. 그리고 어머니가 상민이나 노비출신이였던 서얼들을 구제하기까지한다. 이쯤되면 오늘날 이들은 독재자라는 소리까지 들을 법하다.
하지만, 아무리 시대상황이 신분계급이 붕괴되고 있는 상황이라도, 노비제도를 완화하고자,어머니가 천민이 대다수인 서얼을 없애고자, 노력한 이는 바로 이 영조,정조였다. 그 때 시대상황이 그럴 수 밖에 없다고하더라도, 어쩌면 천민출신소생이라는 치명타를 가지고 있는 영조와 그 피를 가진 정조였기에, 더욱 노비제도 폐지에 정성을 쏟아을 수도 있겠고, 자신이 천민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역시 그들과 비슷한 서얼구제에 관심을 가져서 그들을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양성하고 싶겠구, 아울려 자신들의 천한 출생을 뒤에서 비웃는 양반들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하여, 조선왕조를 중흥하려는 꿈이 절실했는지도 모른다.
영조 아버지 숙종과, 영조 어머니 숙빈 최씨. 원래 이름이 동이였군요 ㅡㅡ;
그러나 가장 노비, 천민이라는 것에 약점을 가지고 있었던 영조는 차마 서인 노론을 이기지 못하였기 때문에, 서얼을 없앨 수가 없었고, 그들의 주장대로 노비종모법 즉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간다는 걸로 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조보다 더 독재자(?)로서 강한 면모를 보였던 정조는 노비해방까지 준비했다. 어쩌면 영조는 왕의 아들이라도, 신분이 천했기 때문에 강한 군주였다고해도, 위축되는 면도 없지 않았고, 집권층의 요구를 수용할 수 밖에 없었고, 그래도 정조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과 어머니가 명문가 여식이였기 때문에, 자신만만하게 살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조가 있었기 때문에, 정조라는 훌륭한 군주가 나올 수 있었고, 영조 또한 조선왕조를 다시 세운 뛰어난 군주였다. 영조의 머리가 참 좋았던거보면 숙빈 최씨, 즉 동이가 참 영특한 여자였음이 틀림없겠다. 그만큼 영리했기에, 천민 출신임에도 서인 노론 인현왕후, 남인, 서인 소론으로 연결되는 장희빈을 내세운 권력암투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끝내 영조를 왕위로 올렸겠지.
그나저나 분명 신분계급은 1894년 갑오개혁 때 철폐되었는데, 왜 우리는 천민 출신 무수리가 후궁이 되어서 끝내 훌륭한 왕을 낳은 옛날 옛적 스토리가 단지 아 그 땐 그렇게 모순된 사회였구나, 지금과는 너무 다르다라면서 아무 생각없이 받아들일 수 없는지 모르겠다. 여전히 우리는 서운대출신 여자가 서울대 출신 의사를 만나는 것에 환호하고, 고교 중퇴 식모가 대학에 들어가서 행복해지는 것을 바란다. 이러다가, 백년도 채 안되서 영조와 같이 자신의 태생에 대해 아킬레스건을 가지고 있는 유능한 지도자가 나타날 수도 있겠다. 아니, 서운대나 고교중퇴가 아주 예뻐서 상류층의 세컨드로 들어가지 않는한, 불가능한 일이 되어버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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