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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전망대

'사임당'. 이겸(송승헌)이 돋보이는 로맨스 드라마로 자리잡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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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사임당 가지고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당대 최고 여류 예술가, 율곡 이이 어머니. 한 개인으로서 이룬 업적은 많지만, 왜적의 침입에서 나라를 구한 것도 아니고, 대다수 일반 백성들의 삶과는 동떨어진 그녀의 인생을 어떻게 30부작 드라마로 그릴 수 있을까. 박정희 정권 이후 신사임당을 현모양처의 표본으로 신격화하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일어났지만, 그럼에도 신사임당에 관한 드라마와 영화는 제작되지 않았다. 아니, 신사임당을 어떻게 그려낼지 몰라 못했다고 하는게 맞겠다. 




SBS <사임당, 빛의 일기>(이하 <사임당>)이 사임당을 어떤 캐릭터로 해석할 지 도무지 감이 안 잡히는 가운데, <사임당>이 선택한 방식은 놀랍게도 사임당(이영애 분)과 허구의 인물 이겸(송승헌 분)의 사랑 이야기이다. 실제 이겸이라는 인물이 신사임당과 동시대에 살긴 했는데, 드라마 속 이겸은 실존 인물 이겸과 전혀 다른 인물이다. 


드라마에서 이겸은 어린 시절 정혼자 사임당을 잊지 못하고 계속 사임당의 주변을 맴도는 인물이다. 역모에 휘말려 결혼을 하지 못한 사임당과 이겸의 이별 이유도 놀랍다. 어찌되었던 그로부터 20년이 지나고, 유부녀가 되어 무능한 남편 때문에 지지리도 고생하는 사임당의 키다리 아저씨를 자청하는 이겸의 존재.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장면 같다. 그렇다. 아침 드라마, 일일 드라마에서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 유부녀(혹은 이혼녀)와 모든 것을 다 갖춘 총각 간의 사랑 이야기이다. 


지금에야, 결혼한 부부가 이혼도 할 수 있고, 필요에 따라 재혼도 할 수 있지만, 조선시대. 남자는 본부인 외에 축첩이 가능하면서 여자에게는 일부종사를 강요했던 시대에, 남편이 버젓이 있는 여자를 좋아하는 남자와 애써 그 남자를 피하고는 있다고 하나, 은밀한 썸씽을 나누는 여자 이야기? 그것도 현모양처의 표본이라는 신사임당을 그렇게 그려내니 파격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래, 사임당에게도 첫 사랑이 있었고, 철없는 남편(?) 때문에 속을 썩던 중, 다른 남자에게 눈 돌아간 일도 있었겠지. 하지만 사임당과 이겸의 은밀한 사랑 이야기가 드라마의 주를 이루다보니, 현모양처 이미지로 신사임당을 기억하는 많은 시청자들에게는 쇼킹 그 자체다. 


사임당과 이겸의 사랑 이야기야. 원래 우리나라 드라마에서는, 특히 여성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한 드라마에서는 남녀간의 사랑 이야기가 필수 조건 이니까 시청률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치자. (역시 무능하고 철딱서니 없는 남편 때문에) 경제적 궁핍을 겪다가 제지 산업에 뛰어들고, 가난한 유민들의 정신적 어머니가 되는 과정은 정말 생각하지도 못했던 전개다. 사임당이 공부와 거리가 멀었던 남편 이원수 때문에 마음 고생은 많이 했다고 하나, 경제적으로 큰 곤란은 겪었다는 역사적 기록은 없다. (사임당은 양반의 권위가 높던 조선 중기 지배층 여성이다.) 먹고 사는데 큰 지장이 없으니까 아이들 교육에 전념하면서도 수많은 명작들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고, 예나 지금이나 이는 변하지 않는 세상의 이치다. 그런데 드라마의 사임당은 종이를 만들고, 온화한 미소로 가난한 유민들을 보살핀다. 이러다가 사임당의 재해석이 아니라, 나라를 구한 여장부 사임당으로 인물 자체가 재창조될 기세다. 


드라마가 꼭 실존 인물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따를 필요는 없다. 특히 사임당처럼 조선 후기, 일제강점기, 박정희 정권 등 지배층의 이해관계에 의해 왜곡된 가능성이 높은 인물 같은 경우에는 더더욱 말이다. 그러나 드라마 <사임당>이 사임당을 내세워 보여줄 수 있는게, 2003년 인기리에 방영한 MBC <대장금>의 사임당 버전이라면, 왜 굳이 사임당을 가지고 이런 드라마를 만들었는지 적잖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사임당의 모든 것을 시기 질투하는 악녀의 괴롭힘. 악당들의 끊임없는 방해 공작에도 정도의 길을 걸어 마지막에서야 비로소 꽃길을 걷는 주인공. 그리고 그 주인공을 연모하면서, 뒤에서 묵묵히 서포터 해주는 남자 조력자의 등장. <대장금> 이후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사극 드라마에서 줄기차게 내세운 일종의 클리셰이다. 이런 류의 사극들은 이제는 식상하다는 시청자들의 반응에도 시청률적인 면에서도 일정 부분 성취를 일구어냈고, <사임당>도 이 길을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사임당>은 200억 제작비와 이영애, 송승헌이라는 네임벨류가 무색하게, 간신히 10% 안팎의 시청률을 기록 중이다. 이 시청률도 사실 이영애, 송승헌이기에 가능한 시청률인지도 모른다. 그나마 드라마에 대한 호평이 송승헌(이겸)의 멋있음에 쏠려있으니까 말이다. 


그래도 사람들이 <사임당>을 좋게 봐주는 요소가 송승헌에 연기하는 이겸이라는 캐릭터에 쏠려 있으니 앞으로 <사임당>은 이 기세를 빌려 사임당과 이겸의 이뤄질 수 없는 애틋한 로맨스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그래서 시청률은 지금보다 올라갈 가능성은 있겠지만, 이걸거면 왜 굳이 '사임당'을 내세웠는지 의문이다. 차라리 조선 중기를 배경으로 '사임당'이라는 인물을 암시하는 허구적 인물들로 드라마를 만들었다면, 주인공들의 사랑 이야기에 더 몰입이 되고 좋은 평가를 받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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