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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전망대

뿌리깊은 나무 시청자들의 가슴에 와닿는 똘복의 한맺은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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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채윤으로 변장한 한짓골 똘복(장혁)이 세종 이도(한석규)를 죽이려고 한 것은 순전히 '오해' 였다. 이도는 애시 당초 똘복 아버지를 죽일 의도조차 없었다. 되레 자신이 장인과 아무 죄없는 노비들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수십 년을 보냈다. 하지만 이도는 '오해'이기 때문에 "오해다" 라고 했을 뿐, 왜 우리 아버지를 죽였나요라는 절규에 침묵이 내 답이라는 뻔뻔한 답변은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이도는 자신을 원망하는 담이(소이. 신세경)에게 "내가 너희 아버지와 똘복이를 죽이려고 죽인 것이 아니다"(담이는 똘복이 죽은 줄만 알았다) 를 강조했다. 이제는 강채윤이 아닌 똘복이에게도 여전히 그가 과인을 믿고 따라와 주길 바랐다.

 

하지만 똘복이는 세종의 대의를 알면서도 쉽게 그의 편이 되어주지는 못했다. 되레 천한 백성은 글자를 알아도 죽고 몰라도 죽는다고 하였다. 알면 안다고 죽이고 오히려 양반들의 책임을 모두 백성에게 뒤집어 쓸 것이라고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다. 작년 추노에서 세상의 온갖 부조리에 격분했던 명장면을 선보인 배우 장혁의 연기의 포텐이 활활 터져 오른 순간이다.

 


원래부터 새 글자의 효능을 못미더워했던 똘복이 한층 더 나아가 자결까지 하려했던 것은 반푼이 아버지가 남긴 유서에서 받은 충격 때문이다
. 평생을 심온 대감 노비로 살았던 아버지는 죽어가면서도 나는 억울하다. 이도를 죽여라가 아닌 너는 글자를 배워 주인 마님 잘 모시고 살아라였다. 아무 죄 없이 죽어가면서도 자식에게 주인의 안위를 맡기는 노비의 서글픈 숙명이다. 아무리 글자를 알아도 노비는 양반이 될 수 없고 계속 양반을 섬겨야하는 더러운 세상을 경험한 똘복의 눈에 백성들을 위해 글을 만들겠다는 이도는 헛된 선민사상에 빠져버린 어리석인 임금에 불과하다.

 

역시나 머리가 비상한 정기준은 세종이 비밀리에 추진하는 일이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것임을 단박에 알아차린다. 그래서 기껏 똘복에게 꼼수로 밀본지서 하나 얻었을 뿐인데 자신에게 충성을 과시하는 수족들을 시켜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것은 중화사상에 반하는 이적행위라는 점을 널리 퍼트린다. 엄연히 말해서는 중화질서를 유지해야 삼봉 선생님의 대의아니 선비들만이 잘 먹고 잘사는 나라를 구현할 수 있는데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문자는 높은 나으리들 대의에 반하는 행위다.

 

문제는 궁극적으로 가장 큰 수혜를 받는 백성들조차도 왜 왕이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다. 글자를 알아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 보통 백성들의 생각이다. 과연 그럴까? 만약에 몇 년 전 역병이 돌았을 때 글자를 알아 방을 읽을 수 있었더라면 최소한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이 화마에 어처구니없이 목숨을 잃는 비극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글자를 안다고 해도 당장 양반으로 신분이 상승하는 것도 아니고 금은보화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새로운 글자 덕분에 몇 백년 뒤에는 천민인 그들의 후손도 양반이 될 수 있었고, 권력자의 부조리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을 얻을 수 있었다. 결코 이도는 백성들에게만큼은 손해 보는 헛된 짓을 펼치지 않았다.


권력층이 아닌 백성들이 원하는 삶은 소박하다
. 세상에 대한 근심 걱정 없이 무탈하게 잘 먹고 잘 사는 것. 하지만 이 나라의 권력층들은 백성들이 행복하게 살도록 가만 냅두지 않는다. 심지어 백성들이 즐기는 오락까지도 감히 높으신 나으리님들을 비하했다는 이유만으로 마음대로 즐기지 못하게 한다. 이쯤 되면 글자를 알아도 더 꼼꼼하고 디테일하게 당한다는 똘복이의 말이 맞는 것처럼 들린다. 그렇다. 제아무리 한글은 기본이요 영어까지 구사하고 대학 교육까지 받아도 힘 있는 자들에게 어처구니없는 사소한 이유로 당하고 마는 비참한 현실 속에서 힘없는 백성들은 조선시대나 21c 대한민국에서나 여전히 울부짖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지난 700여년 전 지금 미국과 일본을 떠받들 듯이 중국 명나라의 중화사상을 하늘처럼 섬기던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을 어여쁘게 여겨 세종대왕님이 친히 만드신 글자가 있다. 단순히 한글만 안다고 출세를 하는 것도 수많은 부를 축적하는 것도 아니지만 힘없는 자들이 똘똘 뭉쳐 지배층의 횡포에 맞설 수 있는 기반은 마련된 셈이다.

 


계속 이어지는 설득에도 도저히 말을 듣지 않을 것 같았던 똘복이 다행히도 새 글을 창제하려는 이도와 담이의 편에 서게된 듯하다
. 물론 똘복이 위기에 처한 담이를 구해준 것은 말로는 잊겠다하지만 여전히 못 잊었다는 것이 주요 원인이지만 백성의 한 사람으로서 글을 창제하겠다는 왕의 취지에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노비신분 치곤 글자도 알고 이도 정도는 아니지만 머리가 비상한 똘복이 새 글을 만들어 백성을 이롭게 하겠다는 이도의 대의에 회의적인 것도 피지배층으로서 너무 많이 똑똑했기 때문이다. 글을 알아도, 양반만큼 유식해져도 결국은 양반을 모시고 살아야하는 인생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똘복이다. 그토록 죽이고 싶은 이도 앞에서 그동안 가슴에 차곡차곡 쌓아왔던 천민으로서 억울하게 살아온 삶을 사자후처럼 토해내는 똘복의 절규는 결코 똘복 개인만의 분노와 원한에서 그치지 않는다.

 

다행히 머리가 좋은 똘복은 자신의 평생 원한을 원한에서 마무리 짓지 않고 다시는 자신처럼 아무 잘못도 없는데 억울하게 권력욕에 희생되는 백성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각성을 하게된다. 뭣도 모르고 왕을 죽이겠다고 달라 드는 한짓골 똘복이에서 이제는 백성을 위하는 이도와 담이의 일에 방해하는 높으신 나으리들에게 대항하는 한짓골 똘복이로 변모한 셈이다.

 

백성과 나라를 위한 옳을 일을 추진하면서도, 세종의 진심을 의심하는 일개 천민에게 조차도 언젠가는 그가 자신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 하에 끝까지 기다리고 설득한 이도의 포용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분명 작가의 픽션에서 꾸며진 이야기이지만 실질적 평민들이 개그를 개그로 받아치지 못하고, 고소를 하겠다는 대단한 국회의원 나으리에게 속절없이 당하고 사는 21c 대한민국에서 감히 노비 주제에 왕에게 죽이겠다고 대들어도 너그럽게 용서해주는 자상한 군주를 가진 <뿌리깊은 나무> 속 백성들이 한없이 부럽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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